기초과학

기초과학 중심 유리(Glass)는 고체일까 액체일까? — 상변이의 경계에 선 물질의 비밀

insight09249 2025. 11. 12. 06:06

유리는 고체도, 액체도 아닌 비정질 상태의 물질이다. 급속 냉각으로 인해 원자 배열이 무질서하게 고정된 ‘정지된 액체’이며, 상변이의 경계에 존재한다. 유리의 본질은 시간과 에너지의 관계로 정의되며, 이는 물질이 고정되지 않은 동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기초과학 중심 유리(Glass)는 고체일까 액체일까? — 상변이의 경계에 선 물질의 비밀

 

1.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닌 물질 — 유리의 미스터리

우리는 일상 속에서 유리를 ‘딱딱한 고체’로 인식한다. 창문, 컵, 스마트폰 화면까지 유리는 분명한 형태를 지니며 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물리학의 시선으로 보면, 유리는 엄밀히 말해 완전한 고체도, 전형적인 액체도 아닌 ‘비정질 고체(amorphous solid)’라는 독특한 존재다. 얼음처럼 규칙적인 결정 구조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유리는 원자 배열이 마치 액체처럼 무질서하다. 그러나 그 무질서한 상태가 오랜 시간 동안 굳어져 움직이지 않기에, 우리는 그것을 고체로 인식할 뿐이다.

이 모순적인 성질 때문에, 과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유리의 본질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중세 시대에는 오래된 유리창이 아래쪽이 더 두꺼운 것을 보고 “유리는 천천히 흐르는 액체”라는 설이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이 주장을 부정한다. 유리는 상온에서 흐르지 않는다. 대신 유리는 ‘유리 전이(glass transition)’라는 특수한 과정을 통해 액체에서 고체로 변하는 비평형 상태(non-equilibrium state)로 고정된다. 즉, 유리는 냉각된 액체가 ‘시간이 멈춘 듯한 형태’로 얼어붙은, 상변이의 경계에 선 물질인 것이다.


2. 결정과 비결정의 차이 — 원자 구조의 숨은 질서

일반적인 고체는 결정 구조(crystal structure)를 가진다. 원자들이 일정한 주기적 배열로 정렬되어, 전체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유리는 이런 규칙성이 전혀 없다. 마치 액체가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듯, 원자들이 무작위로 얽혀 있다. 이를 비정질(amorphous) 구조라고 한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액체가 냉각되며 점점 점도가 증가하다가, 일정한 온도(유리 전이 온도, Tg)에 도달하면 원자 운동이 사실상 멈춘다. 하지만 결정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고체가 아니다. 이 상태는 열역학적으로 불안정하며, 시간에 따라 아주 느리게 변할 수도 있다. 즉, 유리는 “평형에 도달하지 못한 액체”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질은 유리의 다양한 특성을 결정짓는다. 예를 들어, 유리는 결정질 물질보다 열전도율이 낮고, 빛의 산란이 적어 투명하다. 또, 원자 간 결합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외부 충격에 약하지만, 동시에 매우 높은 화학적 안정성을 가진다. 즉, 유리의 강점은 그 불완전함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유리는 ‘완전하지 않음’으로 인해 다양한 산업적 활용성을 얻은,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흥미로운 물질이다.


3. 유리 전이(glass transition) — 시간과 온도의 싸움

유리가 탄생하는 과정은 단순한 냉각이 아니다. 액체 상태에서 점점 온도를 낮추면,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려는 결정화 과정(crystallization)이 시작된다. 그러나 급속 냉각을 하면, 원자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움직임이 ‘정지’되어 비정질 상태로 남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이 바로 유리 전이이다.

이 과정은 온도뿐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만약 충분히 천천히 냉각한다면, 원자들은 에너지적으로 안정한 구조를 찾을 수 있어 결정이 형성된다. 반대로 냉각 속도가 너무 빠르면, 원자들이 움직일 시간을 잃고 무질서하게 고정된다. 따라서 유리는 단순히 “얼어붙은 액체”가 아니라, 시간이 응고된 물질이라 할 수 있다.

열역학적으로 보면 유리는 완전한 평형 상태가 아니다. 시간이 매우 오래 지나면, 이 비정질 구조는 서서히 안정한 상태로 재배열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 속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느리다. 예를 들어, 실험에 따르면 상온에서 유리가 흘러 ‘형태가 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천억 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즉, 유리는 인간의 시간 스케일에서 볼 때 ‘정지된 액체’이지만, 우주의 시간 스케일에서는 여전히 ‘움직이는 물질’이다.


4. 상변이의 경계에서 — 유리가 말해주는 물질의 본질

유리는 고체와 액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모호함은 물질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고체와 액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형태인가, 구조인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인가? 유리는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물질의 상태는 단순히 온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유리는 마치 “물리학적 시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액체였던 순간의 무질서한 배열이 시간의 흐름에 멈춰버린 채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 ‘멈춤’을 고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그 내부에서는 여전히 불안정한 에너지가 존재한다.

따라서 유리는 단지 물질이 아니라, 상변이와 시간,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에서 존재하는 과학적 시(詩)이다. 그 존재는 고체와 액체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자연의 복잡성과 유연함을 상징한다. 결국 유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 세상의 모든 물질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